생명을 살리는 비법
(열욍기상17:17-24, 2013.3.17)
장로회신학대학교 김운용 교수님이 기독 공보에 올린 글입니다. 이 글은 북한 선교를 하시는 재미교포 선교사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북한 접경에서 밥을 나누는 사역을 하시는 그분은 언젠가 냇물을 건너 식사를 하러 오신 분들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강을 건너 온 그들의 옷은 남루했습니다. 옷이 얇아 많이 추워보였습니다. 신발은 다 떨어져 있었으며 얼굴은 검었습니다. 그 중 79세인 김씨 할아버지에게서 일종의 경외감이 느껴졌습니다. 탈북을 원한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기에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찬송이나 마음 놓고 한번 불러보고 싶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언제 나오실 수 있으셔요?”“빠를수록 좋지 않을까요? 순간 머릿속에서는 비용을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안전하게 피하게 할 방법과 이동 경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돌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공안은 어떻게 설득해야 하며, 아이들도 있는데 어느 산을 넘어야 할지, 그러나 길게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자유의 땅에서 맘껏 찬송 한 번 불러보는 게 소원이라는 분에게 다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그런데 그 할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가슴을 쳤습니다.“마지막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어보아야지요.”그리고 그분은 일어나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가셨습니다. 한 10여 분이 지났을까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신 할아버지의 거친 얼굴에는 눈물로 가득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물었디요. 하나님, 저 미국에서 온 목사님이 우릴 돕겠다는데 따라 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디요.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들을 북한에 남겨두는지 아느냐?”고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어깨가 들썩거렸습니다.“목사님, 매 맞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굶는 것도 하나님의 목적이랍네다. 기회가 주어지면 남조선에 가서 찬송이나 실컷 부르고 천국에 가고자 했는데 북한 땅에 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시니”할아버지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서울로 가시자고 권하는데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나도 압네다,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내도 예배당 종도 쳐봤고,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도 해 봤디요. 하지만 이 자리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시니 자유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하디 안 같소? 압네다. 내도 압네다. 마음 놓고 성경 읽고, 찬송하고, 새벽기도 나가고, 헌금도 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게 얼매나 좋은겐지 허나 하나님이 뜻을 앞설 수는 없디요.”결국 작별 인사를 할 때 그 분은 강한 어조를 말했습니다.“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요!” 그렇게 헤어진 후 돌아오는 길에 하늘의 음성이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랴!”고 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의 배경은 사렙다에 사는 과부는 남편이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어린 아들만 남겨 놓고 죽었습니다. 혼자서 아들과 함께 사는데 힘들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가뭄이 들어 먹을 것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제 통에 가루 조금과 병에 기름이 조금 남아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으로 아들과 함께 떡을 만들어 먹고 죽음만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사렙다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순종하기를 목숨을 걸고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미쁘게 여기셔서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집에 청천벽력 같은 우환이 덮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살리는 기도는 어떠합니까?
회개가 있는 기도입니다.(17-18)
17절 말씀을 보세요.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이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고 했습니다.
과부의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던 어린 아들이 갑자기 병이 들더니만 얼마 되지 않아 죽어 버렸습니다. 왜? 이 아이에게 갑자기 중병이 들었는지. 그리고 왜? 이 아이가 갑자기 죽었는지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여인의 마음이 죄책감으로 가득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를 향해 절규합니다.
18절 말씀에“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여기 온 것은 나로 하여금 내 죄를 생각나게 하려고 오셨나이까? 내 죄 때문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이것이 아들을 잃은 젊은 여인의 통곡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원망처럼 들리지만 깊은 내면세계에서 솟아난 죄에 대한 자복이요 통회입니다.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는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있는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어린 아들이 죽고 나니까 먼저 회개 자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죄 때문에 이 어린 자식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말씀하소서. 내가 어찌하면 좋겠나이까?”이런 울부짖음입니다. 이 여인이 무슨 죄를 지었겠습니까? 눈물겹도록 선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통해 이 여인은 자신의 죄를 지적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 여인은 깊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 자복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어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겪었던 경험과 비슷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적 권능을 확인하였을 때 그는 예수님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에게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니 자신도 예측할 수 없었던 내면세계의 언어가 튀어 나왔습니다.“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 했습니다. 모든 인생에게는 매우 희미하지만 죄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내면세계 안에 갇혀져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날 때 인생은 비로소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렙다 과부의 고백을 보세요.“하나님의 사람이여, 어찌 나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시나이까!”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중 가장 존귀한 은혜는 사죄의 은총입니다. 이 사실을 혹 잊고 계시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사순절에 다시 한번 깊은 회개 자복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있기를 바랍니다.
요8:24“너희가 만일 내가 메시야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 으리라”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치 못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죄 값 때문에 영원한 형벌인 지옥의 권세 아래로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런 비극적인 결론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3:16-17“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 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 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죄의 문제는 인생에게 가장 신비하고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죄는 용서받든지 아니면 자신이 그 대가를 지불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죄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지은 죄에 대하여는 즉시 회개하면 됩니다. 그리고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언제든지 열려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요 행복입니다.
요일1:8“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 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 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 가련한 여인의 울부짖음을 들은 엘리야의 태도입니다. 엘리야는 여인의 죄를 들추어 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이 과연 너의 죄 때문이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여인의 슬픔을 온 몸으로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의 아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기도하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기록은 되어 있지 않지만 엘리야도 하나님께 회개를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을 살리는 기도는 회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의 기도를 통해 함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또 생명을 살리는 기도는 어떠합니까?
고통을 함께 나누는 기도입니다.(19-21)
19절 말씀을 보세요.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라 했습니다.
이 아이는 이미 숨이 끊어졌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죽은 아들을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자신의 가슴으로 안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거하던 다락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아이를 침상에 누이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엘리야가 부르짖었다는 것은 그의 간절한 기도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아들을 잃은 여인의 슬픔과 동일한 슬픔을 가지고 엘리야는 부르짖었습니다. 엘리야의 부르짖음은 그 여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부르짖음입니다.
20-21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의 핵심은 이것입니다.“하나님! 이 가련한 여인에게 또 고통이 덮쳤나이다. 이 여인을 고통가운데서 구하옵소서.”라입니다. 우리가 다른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므로 그 고통을 감소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이웃을 위한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기도여야 합니다.
엘리야가 그 여인의 고통에 참여하는 방법은 기도였습니다. 엘리야는 기도하므로 그 고통 받는 여인의 눈길을 자신과 함께 하나님을 향하게 한 것입니다.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을 향해 눈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고통을 감소시킵니다. 그리고 더불어 해결하는 원천입니다. 고통을 당한 당사자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실체적 진실은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고통의 의미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고통이 때로는 하나님의 분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인생을 더욱 성숙한 단계로 이끌어 올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만이 그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 하나님께 배울 수 있습니다.
시123:2“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 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 기를 기다리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나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가져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결같은 마음은 여호와께서 긍휼히 여기심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무거운 십자가를 함께 지는 것입니다. 또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겸손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자신을 과시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고통당한 사람을 정죄하는 수단도 아닙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럴 때 생명을 살리는 역사로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생명을 살리는 기도는 고통을 함께 나누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기뻐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기도는 어떤 역사로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으로 나타났습니다.(22-24)
22-23절 말씀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 어미 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는 드디어 죽은 아이를 살렸습니다. 엘리야는 아들을 그 어미의 품으로 돌려주었습니다.“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이선포는 그 과부에겐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이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 털어서 몇 안 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이런 기적은 보편적인 기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기적은 분명히 역사적 진실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합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도에 응답하십니까?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상징적 사건이 오늘에 말씀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기적이 보편적인 기적이 아닙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면 누구한테든지 일어나는 기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부활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한 극히 이례적인 상징적 사건입니다. 동시에 육의 생명을 살리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기도의 목적은 영적인 생명을 살리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생명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영적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기도하는 목표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과 같아야 합니다.
요10: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 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 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 이라.”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진다는 것은 보다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깊은 경지에 들어간다는 것은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어린 아이일 때는 기도를 내 욕심을 채우는 도구 정도로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기도는 내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와 신앙생활의 모든 목표는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재물만 있으면 생명을 부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시 말로는 아니다하면서 다 마음속에는 그렇지 않는 경우가 잇습니다. 과연 재물이 생명을 풍성하게 합니까?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2:15“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재물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찬송가167장에“이 세상이 즐기는 재물로는 네 근심과 고초를 못 면하리 또 숨질 때 위로를 못 얻으며 저 천국에 갈 길도 못 찾으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생명을 살립니다. 생명을 생명 되게 합니다. 우리는 힘들 때 기도합니다. 궁핍을 느낄 때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실 모든 부문에서 궁핍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곤고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아십니다. 아시기 때문에 부르십니다.
마11:28-30“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 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 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이것의 기도의 본질이요, 기도의 목적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쉼을 얻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누구인 줄을 압니다. 기도는 생명 잔치로의 초대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살립니다.
렘33:3“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 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제 아들을 다시 품에 안은 사렙다 과부의 고백을 보세요.
24절 말씀에“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여인의 고통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끝났다고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과 말씀의 능력을 확인한 것입니다.“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을 알겠습니다.”그렇습니다. 기도응답을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더욱 친근해집니다. 이 여인은 엘리야와 함께 기도하면서 기도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받은 진정한 축복은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다시 살아난 아들도 언젠가 다시 떠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자신이 먼저 아들의 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의 다시 살아나게 됨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천국의 소망이 그의 기쁨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내 곁을 떠납니다. 재물도, 건강도, 지식도 결단코 마지막 희망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나도, 재물이 순식간에 없어져도, 건강을 잃을지라도, 주님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시73: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 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생명을 살리는 기도는 회개가 있는 기도입니다. 고통을 함께 나누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으로 나타났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기도를 통해 죽어있는 영혼을 살리는 여러분의 삶이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도림제일교회 오신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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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감사합니다^^항상 사랑합니다^^